오는 3월 2일(현지 시각)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립니다. 북미에서 개봉한 영화를 총 정리하는 이 시상식은 과연 어떤 영화가 얼마나 많은 상을 받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죠. 하지만 단순히 시상에만 그치지는 않습니다. 전 세계 아카데미 회원들의 투표로 진행되는 후보작 선정부터 이 단체가 말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화제작을 모아보니 몇 개의 주제로 뭉쳐질 수도,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니 그 안에는 당연히 시대의 문제가 담겨있을 터. 올해 후보작을 살펴보며 그 목소리에 담긴 주제와 관련 영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알고 보면 아카데미 시상식을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 #1. 이민자와 트럼프 <브루탈리스트> <아노라> <어프렌티스> 등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 화두는 이민자와 트럼프입니다. 대통령으로서 두 번째 발걸음을 뗀 트럼프는 곧바로 이민자 정책에 브레이크를 겁니다. 1기 때와 비슷한 행보죠. 물론, 그 안에 마약 규제, 중국 견제 등 정치 사회적 문제가 결부되어 있지만, ‘스트롱 아메리카’ 시대를 만들기 위한 초석으로도 읽힙니다.
중요한 건 미국이란 나라는 이민자의 나라라는 점입니다. 웃긴 건 트럼프도 독일 이민자 출신이라는 점이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지만, 이민자의 피가 흐르는 이가 이민자라는 정체성을 버리려 하는 행동이 웃풉니다.
이민자라는 키워드에 걸맞게 아카데미 회원들은 브래디 코베 감독의 <브루탈리스트>와 션 베이커의 <아노라>를 주요 후보작에 올렸습니다. 이민자의 착취로 성장한 미국의 초상 혹은 민낯을 3시간 35분 동안 까발리는 이 영화는 자유를 보장한다는 미국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은 주인공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와 그가 남긴 건축물을 보여주며, 방점을 찍죠. 감독은 영화적으로 수많은 이민자의 고혈로 이룬 미국을 잊지 말자고 관객에게 메시지를 건네는 듯합니다.

<아노라>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이 특별한 건 이민자의 삶. 디아스포라 관점에서 러시아 이민자 3세의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러시아인이자 미국인인 주인공 애니(미키 매디슨)는 미국인처럼 행동하지만 정작 러시아 이민자로서 정체성을 버릴 수 없습니다. 제목을 애니의 러시아 이름인 ‘아노라’로 정한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죠. 션 베이커는 하위 노동 계층의 삶을 사는 애니를 통해 미국 사회에서 살고 있는 이민자들의 녹록지 않는 삶을 보여줍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 귀속되어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소개하죠.
여기에 다소 직접적으로 트럼프를 저격한 영화 <어프렌티스>도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우리의 윈터 솔져 세바스찬 스탠이 트럼프 역을 맡은 이 영화는 문제 많았던 트럼프의 젊은 시절을 소개한 작품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교황 선출을 배경으로 올바른 믿음과 리더를 뽑는 중요성을 설파한 <콘클라베>는 간접적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후두부를 강타하는 작품입니다.
| #2. 나는 누구인가? <에밀리아 페레즈> <위키드> <서브스턴스> 등

<아노라>에서도 살짝 비췄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정체성을 탐구하는 영화가 다수 후보작에 올랐습니다. 과연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그 물음에 답하는 영화 중 한 편을 꼽으라면 작품상 등 총 13부문 후보에 오른 <에밀리아 페레즈>를 들 수 있겠네요.
자크 오디아르의 신작인 이 영화는 여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갱단 보스와 아무것도 몰랐던 그의 아내, 새로운 삶을 선물할 변호사가 얽힌 뮤지컬 영화입니다. 사회가 정한 역할이 아닌 본연의 나로서 살고 싶어 하는 주인공들의 지난한 과정이 마음을 흔드는데요.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고 내가 선택한 나로서 그 삶을 받아들이겠다는 이들의 이야기가 강단 있으면서도 서글프게 다가옵니다. 다만, 주인공 에밀리아 역을 맡은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의 과거 SNS 이력 등 갖가지 부정 이슈 때문에 수상에 먹구름이 껴 있네요.

좀 더 밝은 정체성 탐구 영화는 <위키드>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힘과 본성을 발견하지 못한 엘파바(신시아 에리보),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의 마법 같은 우정을 그린 이 작품은 뮤지컬 원작으로서 흥겨움을 지닌 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죠. 정체성을 찾는 두 영화 모두 뮤지컬 작품이네요. 물론, 결은 다르지만요.
<서브스턴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50대의 ‘나’와 20대의 ‘나’가 하나라는 독특한 콘셉트인 이 작품은 바디 호러를 표방한 사회 풍자극의 느낌이 강하지만, 본질적인 물음은 과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됩니다. 진정 나를 나답게 하는 게 젊음인지, 미(美)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데미 무어와 마가렛 퀄리의 연기로 보여주는데요. 특히 데미 무어의 연기는 그의 실제 삶을 간접 체험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입니다. 아마 가장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가 아닐지 생각합니다.
이 밖에도 작품상, 촬영상 등 후보에 오른 <듄: 파트 2> 장편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와일드 로봇> <인사이드 아웃 2>로 정체성 찾기에 관한 영화로 분류할 수 있겠네요.
| #3. 평화만이 살길! <컴플리트 언 노운> <플로우> 등

평화가 죽어가고 있는 시대! 아카데미는 평화라는 주제에 걸맞은 영화를 포진시켰습니다. 그 선봉장에 있는 영화는 티모시 샬라메 주연의 <컴플리트 언 노운> 입니다. 시대의 뮤지션 전기 영화이기는 하지만 평화를 노래한 밥 딜런의 실화를 담은 작품으로써 이는 곧 반전(反戰)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요. 극 중 반전에 관한 직접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있는 그대로의 삶을 노래한 밥 딜런인 만큼 그 기저엔 ‘평화’가 깔려 있다고 봅니다.

올해 장편애니메이션 유력한 후보인 <플로우>도 진정한 평화를 그린 작품입니다. 인간이 살았던 흔적만이 남아있는 세상에서 주인공 고양이는 물론, 리트리버, 카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가 낡은 배에 올라타고 험난한 파도를 헤쳐나가는 내용은 마치 다양한 나라와 인종이 서로를 이해하고 힘을 합쳐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만큼 지금은 서로가 협력할 때라는 것임을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이죠.
작품상 등 주요 부문에 이름을 올린 <아임 스틸 히어> <니켈 보이즈> 등도 과거 암울했던 과거를 길어 올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상기시킵니다.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알려드린 세 가지 주제에 맞춰 시상식을 보면서 수상의 주인공들을 확인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수상작 및 후보작 중 마음에 드는 한편을 관람하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영화는 현실을 기록하는 논픽션이자 더 나은 미래를 여는 픽션이니까요.